과학자 (명예의전당)/이휘소

교통사고가 막은 노벨 물리학상, 이휘소 박사(1)

Que sais 2020. 12. 1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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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노벨상을 거론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휘소(李輝昭, 19351977) 박사를 거론한다.이휘소 박사의 죽음이 당대의 정치 역학 즉 한국과 미국의 핵폭 제조에 관련되는 것을 볼 때 미국이 자동차 사고를 빙자하여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휘소박사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와 참(charm)입자를 예견했는데 이는 당시 소립자 물리학 발전에 큰 획을 긋는 공헌이다. 이 연구업적을 토대로 7명의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했으므로 이휘소 박사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노벨상은 아무리 탁월한 업적을 보이더라도 사망한 사람에게는 수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유학생 가운데 가장 앞선 물리학자 중 한명으로 평가되는 이휘소는 40여세 초반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그의 과학자로서의 업적은 탁월하다. 물리학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래 약 20년간 모두 11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이 중 77편의 논문이 세계적인 학술지에 게재됐다.

1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69편에 달하며, 50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모두 8편이다. <위키백과>의 자료에 의하면 2013 10월까지 그의 모든 논문들은 13,400회 이상 인용되었다고 적었다.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이휘소에 대한 설명은 한국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다.

 

이휘소는 한국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로 평가된다. 그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은 게이지 양자장론에서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과 참 입자의 탐색에 관한 연구이다. 핵의 베타붕괴 같은 소립자의 약상호작용에 관한 페르미(Fermi) 이론은 1950년대 후반 공간반전 대칭의 깨짐이 알려져 큰 변혁을 가져왔다. 그 후 전자기작용과 약상호작용을 통합하려는 이론들이 생겨났지만 약작용과 관련되는 게이지장의 재규격화가 큰 걸림돌이었다.

이휘소는 게이지 대칭이라는 이론을 이용해 자연계의 네 가지 상호작용 가운데 전기적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합하여 기술하려는 전기약작용 이론에서 문제화 되었던 재규격화의 해결책을 제시하여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했다. 이휘소가 사망한 뒤 게이지 이론은 표준이론이 되어, ‘전기 자기 현상을 통합 설명하는 맥스웰(Maxwell) 이론에 버금가는 물리학 이론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휘소는 이 방면에서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물리학자로 꼽힌다. 또한 그는 비록 이론 물리학자이지만 실험물리학에도 비범함을 나타내, ‘참 입자의 탐색과 같은 그의 현상론적 논문은 실험물리 학자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됐다.‘

 

<수석이 당연한 학생>

일제 강점기였던 1935 1 1,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에서 아버지 이봉춘, <자혜병원>의 소아과 의사인 어머니 박순희의 3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봉춘 또한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치료하는 것을 싫어하여 개업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집안 생계는 모친이 도맡아 꾸려나갔다.

이휘소는 어려서부터 천재로 알려져 수석이란 단어가 자동으로 따라 다니는데 1941년 경성사범학교 부속제1국민학교에 시험에 합격한 것도 보통이 아니다. 이 당시 경성사범학교 즉 일본인 학교에 재학 중인 조선인은 2명에 불과할 정도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는데 이휘소는 이를 뚫고 합격한 것이다.

초등학교(초등학교) 4학년 재학 중 광복을 맞이하였고, 광복과 함께 경성사범학교가 폐지됐기 때문에, 1947년에 졸업할 무렵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 소속이었다. 1947년 경기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3년 뒤인 1950년 경기고등학교(중학교4학년)에 역시 수석으로 합격했다. 곧이어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이휘소 일가는 보통 사람처럼 여러 곳을 전전하는데 모친이 다행하게도 공주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이 당시 어린 이휘소는 어머니를 도와 이웃 도시 대전까지 나가서 병원 운영에 필요한 약품을 사오곤 했다.

이휘소를 비롯한 학생들이 피난 생활을 이어가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닌데 다행하게도 교육에 대한 전시 훈령이 발효돼 이휘소는 위탁생 신분으로 마산중학교에 임시 편입했다. 얼마 후 경기중학교가 부산으로 옮겨오자 경기중학교로 옮겼는데 이때 이휘소의 천재성이 또 다시 발휘된다. 이휘소는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중퇴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획득한 후 1952년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모든 시험이 쉬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서구 대신동에 해당하는 지역의 가건물로 옮겨 와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서울대학교만 따로 있지 않고 전시 연합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모든 대학교가 한 곳에 모인 상황에서 수업만 학교별로 따로 받았다. 서울대학교는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이후 서울로 옮겼다. 그는 서울대학교 화공학과에서 한 학기 수업을 받은 후 물리학에 큰 흥미를 느껴 수차례에 걸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시도했다. 그가 화공학보다는 전기나 자석을 원리적으로 이해하는데 더욱 관심이 많았기 때문인데 당시 서울대는 일단 입학한 과로부터 다른 학과로의 전과를 바꾸어주지 않았다.

 

과천과학관 명예의 전당

최근에는 학문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학과 운영의 유연성을 살려 전과가 마냥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물리학에 대한 관심은 그를 사라지지 않아 학교 수업과는 별도로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하던차에 물리학과에 전과가 허락되었다. 당시 서울대학교에서는 학과 간의 전과를 금지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으로 전과가 허락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을 받는 유학 장학생에 선발됐다. 그가 편입할 대학교는 오하이오 주 옥스퍼드 시의 마이애미 대학교로 1955 1월 이휘소는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였고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에 편입 등록했다.

마이애미 대학교에서는 편입 전까지의 서울대학교에서의 성적을 고려하여 모두 70학점을 인정해 주었는데 70학점은 당시 미국 대학교 학제로서 약 2년 반 정도에 해당하므로 3학년 과정에 바로 진학했다.

그의 유학 생활은 매우 바쁘게 돌아갔다. 장학금으로 학비는 충당할 수 있으나 생활비를 벌어야하므로 수업을 들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이곳에서도 발휘되어 미국으로 건너온 지 1년 반 만인 1956 6, 물리학과를 최우등(summa cum laude 숨마 쿰 라우데)으로 졸업하였는데 이를 점수로 환산하면 평균 96.5점이다. 졸업생 중 최고의 성적을 올리자 학과장은 이휘소를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도록 추천했다.

 

피츠버그 대학원에서 이휘소는 교육조교(TA) 장학생으로 공학과와 의예과 학생들의 물리학 실험 TA를 담당하였다. 이듬해 가을학기부터는 연구조교(Research assistant) TA를 겸하게 되자 실험 지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강의를 배정받았다. 더불어 이 동안 핵물리학, 고전 전자기이론, 양자 역학, 고체물리학 등 물리학의 중요 과목을 수강했는데 성적은 항상 최우수였다.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에서 차점 합격자와 총점에서 20점 이상 벌어지는 높은 점수로 수석 합격하였다.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원자핵 이론 강의하는 시드니 메슈코프(Sydney Meshkov) 교수로 이휘소는 물리학 중에서 소립자 이론물리학에 관심을 집중한다. 소립자 물리학은 1950년대 물리학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분야였다. 특히 그의 관심을 끈 것은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가 발견한 중간자다. 현재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중간자는 원자핵 속에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를 묶어 두는 핵 즉 핵력의 근원이 되는 소립자이다.

당시에는 중간자의 질량이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계산 결과가 알려지지 않았다. 중간자의 질량과 움직임을 정확하게 계산하려면 매우 어려운 수학 계산을 해야 하는데 수학에 뛰어났던 그는 이론적으로 중간자의 질량을 계산하였다. 그의 논문은 곧바로 노벨상을 수상한 리처드 파인만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탁월한 재능을 눈여겨 본 메슈코프 교수는 그를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클라인(Abraham Klein)에게 추천하였다. 클라인 교수도 이휘소의 재능을 곧바로 인정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인 예비시험을 면제받도록 해주었으며, TA 장학금보다도 더 혜택이 좋은 해리슨 연구장학금(Harrison Fellowship)을 주선해주기까지 했다. 클라인은 당시 서른 세 살의 젊은 교수로 이휘소는 클라인과 함께 공동 연구를 수행하면서 1960 11 K+ 중간자와 핵자 산란 현상의 이중 분산 관계, Study of K+ Scattering in the Double Dispersion Representation으로 물리학 박사(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받았다. 이 때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물론 대학교의 학제에 따라 그가 박사 학위증을 공식적으로 받은 것은 1961 2월이다. 그러나 그는 논문심사가 끝난 1960 11월부터 1961 8월까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후연구원(포스트닥) 및 전임 강사로 임용됐고 제2차 세계대전을 실질적으로 종결시킨 원자폭탄 개발 책임자였던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소장으로 있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초빙됐다. 이곳은 아인슈타인이 죽기 전까지 연구하던 장소였다.

 

이후 그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격적인데 1961년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되는 동시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방문 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받았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중요성은 당시 세계의 두뇌가 모여 경쟁하는 학문의 중심지인데다 강의의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껏 이론 연구에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휘소는 1961 9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정회원이 되었는데 당시 25살의 나이로 정회원이 된 사람은 이휘소가 처음이었다.

 

강의하는 이휘소 박사

1962 2, 뉴욕 맨해튼의 컬럼비아 대학교의 주임교수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가 이휘소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컬럼비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채용 의사를 밝혔지만 그는 이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돼 있는데다 클라인 교수가 이휘소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임기를 경력으로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하는 대로 부교수로 승진된다는 약속을 받았으므로 아이작 라비의 제안을 거절했다.

1962 3월 말레이시아 화교인 마리안 문 칭 심(Marianne Mun Ching Sim, 중국어: 沈曼菁)과 약혼하고 5월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나이는 27세였다.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딸 각 한 명씩 두었다. 1962 6월 초, 그는 국제 원자력 기구가 주최하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Seminar on Theoretical Physics)에 참석할 10인의 미국 대표단으로 선출되었다. 결혼한 지 2달 후 이휘소는 부교수가 되었고 1963 2월 정교수로 승진했는데 28살 나이로 대학 정교수가 되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