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UNESCO)/조선왕릉

조선 왕릉(73) : 제3구역 선정릉(4)

Que sais 2021. 4. 1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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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없는 왕릉>

중종 시대에 중요한 변혁은 국방 문제다.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1522년 추자도왜변, 동래염장의 왜변, 1525년 전라도 왜변 등 남부 지방은 끊임없이 왜군에게 시달렸다. 뿐만 아니라 북방 국경지대 야인들도 빈번히 침략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라 안팎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세월이었다.

여하튼 중종이 154411월 창경궁에서 사망했는데 왕위에 있던 기간은 무려 39년이다. 조선왕조에서 재위기간이 길지만 사망할 당시 나이는 57세이다. 여하튼 중종이 사망하자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있는 서삼릉(西三陵)의 희릉(禧陵)과 동원이강을 이루고 정자각은 왕과 왕비의 능 사이로 옮겨 설치했다. 그런데 한 달 뒤 조정에서는 왕비 문패 아래 왕이 있을 수는 없다며 능호를 편안하다는 뜻으로 정릉(靖陵)으로 바꾼다. 계비 문정왕후가 당시에 명종의 모후로 정권을 휘두르면서 당시 불교의 총본산인 현 강남의 봉은사 주지 보우(普雨)와 의논하여 서삼릉의 능침이 풍수상 불길하다며 현 위치로 천장한 것이다. 이 점에 관한 한 문정왕후의 입김으로 제1계비 장경왕후와 남편 중종을 갈라놓았다고 인식한다.

이는 문정왕후 자신이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보우는 천장된 능이 그가 관장하고 있는 봉은사(奉恩寺) 인근인 만큼 자기세력을 굳히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긴밀하게 협조하여 다소 무리한 천장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매사에 남다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수많은 일에 관여하였지만 당대의 최고 실력자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천재지변이라는 변수다.

왕릉의 지대가 낮아서 장마철이면 재실까지 물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물이 불어났을 때는 재실 아래까지 잠기고 홍살문 근처는 배를 띄울 정도이므로 보기에 민망하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다. 홍수에 왕릉이 침수가 되자 번번이 이를 보수하기 위해 지대를 높여야 했다. 문제는 이와 같이 능침을 보수하는 작업이 간단한 일이 아니므로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자리가 나쁘다는 이유로 중종은 정릉, 문정왕후는 태강릉의 태릉에 단릉으로 남게 된 것이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사후에는 어느 왕비와도 함께 있지 못했다. 중종의 원비였던 단경왕후는 양주의 온릉에 안장됐다. 그러므로 중종은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 능인 선릉 옆에 홀로 묻혀 부득이하게 단릉이 되었는데 조선 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정릉도 선릉과 마찬가지로 남다른 곤욕을 치룬 것으로도 유명하다.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은 것은 물론 임진왜란 때에는 선릉과 함께 왜군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왕의 관인 재궁(梓宮)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선릉과 정릉이 왜군에 의해 파헤쳐지고, 왕의 시신은 불에 타버렸다는 비보를 들은 선조는 통곡을 하며 사실을 확인케 했다. 확인해보니 선릉은 불에 타 능침에서는 시신이 사라진 채 타다 만 뼈 잿더미들만 나오고 중종의 능인 정릉에서는 염할 때 입혔던 옷이 벗겨진 시신이 무덤 속에 가로 놓여 있었다.

문제는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다는 점이다. 현대 같으면 DNA분석으로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당시에 시신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은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조는 영의정 최홍원, 좌의정 윤두수, 부원군 정철 등 원로대신부터 전에 중종의 얼굴을 보았던 궁녀들까지 동원해 확인했지만 중종이 사망한 지 오래돼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명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도 고령이라 확인이 쉽지 않았다. 시신의 확인이 쉽지 않자 조정에서는 일찍이 왕의 체격을 잘 알고 있는 궁녀 등을 시켜 왕의 모습을 글로 적게 한 다음 시신과 대조토록 했다.

이들 보고서에 따르면 왕은 중키로 이마에 녹두보다 조금 작은 검은 사마귀가 있었으며 보통 체구에 얼굴은 길고 콧마루는 높았다고 했다. 하지만 중종의 능침에서 나온 시신을 볼 때 살은 썩어서 떨어졌고, 검은 사마귀는 알아볼 수 없고, 왕의 얼굴은 길고 턱뼈도 길었는데 이 시신은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 배 위에 대여섯 군데 칼 맞은 흔적 등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중종의 시신과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는 보고다.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혹시나 중종의 시신일지도 모르므로 결국 선조는 뼈와 타다 남은 재를 가지고 다시 국조오례의에 맞춰 염을 해 안장했다. 조선왕릉 중에서 선릉과 정릉만 확실하게 확인할 수 없는 시신없는 무덤이 된 것이다.

모든 능상설(陵象設)국조오례의에 준하였으며 병풍석, 박석, 난간석 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병풍석과 면석 중앙에 십이지신상을 새겼으며 그 주변은 운문으로 장식하였다. 십이지신상은 공복을 입고 관을 쓰고 홀을 들고 있는 문신형의 인신인수관형이다. 면석은 상당부분 마모가 심한 편이며 가장자리는 일정 두께로 테를 둘러 구획을 이루었다. 우석(隅石)은 거의 정사각형이며 운문으로 장식했다. 인석은 모두 12개로 다양한 형태의 화문이 조식되어 있으며 일부는 현대에 들어와 복원하기도 했다.

 

병풍석 바깥쪽으로 12칸의 난간석과 곡장이 설치되었으며 석호·석양 각 2, 석상, 망주석 1, 문인석·석마 각 1, 장명등, 무인석·석마 각 1쌍 등의 석물이 있다. 문석인과 무석인은 장대하고 선각이 뚜렷하며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이다.

무석인상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허리에 포두를 두르고 허리띠를 미었으며 팔에는 비갑, 다리에는 경갑을 돌린 중무장한 차림이다. 갑옷은 몸통을 가린 갑신과 양쪽 다리를 덮은 갑군 모두 소슬무늬이고 허리뒤쪽에는 물고기비늘무늬의 부속갑옷을 대었다. 어깨에 짐승얼굴장식이 있고 짐승의 입에서 나온 듯한 소슬무늬의 갑옷이 팔꿈치까지 덮었다.

무인석은 통방울 눈에 코 부분이 유난히 떨어져나갔다. 는데 문화재청 서부지구관리소 선릉의 김용욱 소장은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코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은 석상의 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있어 떼어 갔는데 돌덩어리를 어떻게 먹었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망주석은 높이 343cm로 상계의 석상 양 옆에 1쌍으로 자리한다. 형태는 팔각으로 원수-주신, 대석-지대석의 석재 2매로 이루어져있다. 원수는 연봉형이며 운두에는 당처문과 연주문으로 장식했다. 염의는 아래쪽으로 길게 내려왔다. 장명등은 팔각으로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호리호리한 인상을 준다. 특히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세부 문양들이 잘 보이는데 정자석-개석, 격석, 대석-지대석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정자석은 2단의 원수로 이루어졌다. 상단은 연봉형, 하단은 원형으로 그 사이에 연주를 돌렸다.

정자각은 정전 3, 배위청 2칸이다. 가구는 정전이 5량가이고 배위청이 3량가이다. 지붕은 정전화 배위청 모두 맞배에 겹처마로 박공면에는 풍판을 설치했다. 포작은 정전이 이익공, 배위청이 초익공이다. 용마루에는 적새를 쌓고 앞뒷면에 회를 바르는 양상도회를 했으며 정전과 배위청 모두 내림마루에 잡상을 설치했다.

정전과 배위청 모두 내외부에 단청했는데 정전의 좌우면과 뒤쪽의 벽은 중방까지 벽돌을 쌓아 화방벽으로 마감했다. 정자각의 내외부 기둥, 인방 및 중방은 모두 석간주칠, 창방 이상은 모로단정이며 벽면은 육색칠이다. 정자각의 후면 어칸에 설치된 신문과 정면 3칸에 설치된 세살청판사분합문에는 뇌록칠이 되어 있다. 정전 및 배위청의 기둥하부의 주근도배의 흔적은 있으나 칠하지는 않았다.

정릉을 나와 정문으로 나가기 직전 우측에 재실이 있고 수령이 500년이 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재실은 다소 작은 정면 4칸인데 좌측 2칸은 한 칸 씩 마루로 된 준비공간이며 우측 2칸은 한 칸 씩 온돌방인데 한 개의 아궁이로 두 방을 동시에 덮히는 구조다.

 

비공개지역 안내를 맡아 준 이상목 선생이 매년 왕릉 별로 제향행사를 개최하는데 행사에 동원되는 사람만 수백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제향을 사전에 준비하는 재실 내에 아무리 보아도 화장실이 없다. 관리소에 들어가서 다른 재실의 경우는 어떠냐고 묻자 모두들 화장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한다.

과거에 제향을 준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화장실이 없다는 것에 대해 각자에게 질문으로만 남긴다.

왕릉에 대한 팁 한마디.

왕릉의 기신제를 각 릉마다 매년 제향일을 정하여 <전주리씨대동종약원>에서 봉향을 주도한다. 기신제는 일반적으로 한밤중에 거행했는데 현재는 낮 12시를 중심으로 봉행한다. 매년 성종릉은 24, 정현왕후릉은 924, 중종릉인 정릉은 129일에 봉행한다. 서울의 중심지인데다 교통도 좋은 선정릉이므로 매년 열리는 기신제를 찾아보는 것도 남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조선 전기 문화의 꽃 피우고 강남 개발을 지켜봤다, 이창환, 주간동아, 2010.06.14.

3명 왕후 7명 후궁 거느렸지만 홀로 안장에 도굴 수모, 이창환, 주간동아, 2010.07.12.

[을 만나다·41]정릉 (靖陵·11대 중종), 정종수, 경인일보, 2010.07.20.

살아선 왕실의 살림꾼 죽어선 시부모 다섯 분 모셔, 이창환, 주간동아, 2010.12.13

기묘사화, 김범, 네이버캐스트, 2012.01.19

도굴 막은 조선왕릉 건축 기술, 이재웅, 동아일보, 2012.07.06

왕릉, 한국문원, 1995

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 이한우, 해냄, 2006

선릉 정릉, 문화재청, 2012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III,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 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