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릉(懿陵, 사적 204호)은 제20대 경종(재위 1720∼1724)과 계비 선의왕후(1705〜1730) 어씨의 능(陵)으로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숙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한국 역사에 큰 파란을 일으킨 희빈 장씨다.
일반적으로 경종을 비운의 왕이라 부르는데 경종의 생애가 어릴 적부터 편치 않았다는 것에 기인한다. 경종이 폐비 장희빈의 소생인데다 정치적으로는 남인계에 속한다는 점 때문에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서인 세력들의 극렬한 반대에 봉착했다. 그러나 아버지 숙종은 신하들의 벌떼와 같은 항의에도 불구하고 경종을 세자에 책봉했다. 이 때문에 경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였던 송시열은 사사되었고 서인은 실각하였다.
어머니 희빈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어린 시절에는 총명함이 뛰어난 세자로 칭송을 받았고 숙종의 극진한 배려 속에서 성장했다. 학문에 힘쓰는 것을 중히 여겼던 숙종은 왕세자에게 늘 학문을 갈고 닦음을 강조했다. 이에 세자는 4살 때 천자문을 익혔고 8살 때 성균관 입학례를 치렀다. 실록은 ‘세자가 입학례를 행하는데 글을 읽는 음성이 크고 맑아서 대신들이 서로 축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경종이 적어도 조선의 여느 왕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린 시절 영특함으로 칭찬받는 세자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가 14살이 되던 해 경종의 일대기에 그야말로 큰 영향을 미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숙빈 최씨가 이복동생인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출산하면서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가 멀어지자 경종 또한 숙종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파되면서 숙빈 최씨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세자(경종)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모함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숙종은 경종의 친모이지만 그녀를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당대에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형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신하들은 상소를 거듭했다. 희빈 장씨가 설령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지만 춘궁(경종)이 걱정하고 마음 상할 것을 염려하여 조금 너그럽게 용서해달라는 탄원이다. 그러나 숙종은 냉철하게 희빈 장씨를 내치고 사약을 내렸다. 이때부터 경종은 점차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모했고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경종은 어려서부터 병약했는데 숙종은 세자가 질병이 있으므로 후사가 없을 것을 우려하여 몰래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것이 추후에 큰 화를 불러 그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의 당쟁이 격화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경종이 즉위한 지 2달 만에 그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건저(建儲, 왕위 계승자를 정하는 일)의 논의가 일어났다. 노론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은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게 한 후 왕이 병환중이어서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우므로 휴양하도록 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소론은 왕권을 침해하는 불충이라 해 강하게 반발하여 이 안건은 결국 철회되었지만 나이 어린 연잉군을 앞장 세우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므로 결론적으로 경종 대에 소론에 의해 노론은 철퇴를 맞는다. 마침 노론이 주도하여 경종을 폐출시키려는 역모사건이 소론 목호룡의 고변(告變)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기회를 엿보던 소론 측은 유배 중인 노론 핵심 4명을 사사(賜死)한 뒤 노론의 주도적인 인물 50여인을 처단하고 170여인을 유배 또는 연좌로 처벌했다. 이것이 ‘신임사화(辛壬士禍)’다.
이후에도 소론의 과격파인 김일경 중심의 정권은 노론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벌여서 그의 재위 4년 동안은 당쟁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이런 정국의 혼란은 경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고 즉위 4년이 되던 해 자리에 누운 지 단 몇 일 만에 급서했다.
그의 짧은 치세 동안 당쟁이 절정에 달했지만 서양의 수총기(水銃器, 消火器)를 모방해 제작하게 했고 독도(獨島)가 우리의 영토임을 밝혀주는 내용을 담은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을 간행하는 등 열성적으로 업무에 나서기도 했다. 여하튼 경종이 남다른 것은 재위 4년 동안 신병과 당쟁의 와중에서 불운한 일생을 마쳐 그를 아는 한국인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경종의 왕비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 어유구의 딸로 세자 시절 첫 번째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가 숙종 44년(1718) 사망하자, 같은 해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경종이 즉위함에 따라 왕비가 됐다. 당시 60세였던 숙종은 눈병이 심해서 며느리인 세자빈이 조현례(朝見禮)를 할 때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백내장이 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한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선의왕후는 경종이 사망하자 왕대비에 올랐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없는 이유로 민담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했다. 숙종은 처음에는 청을 거절했으나 한때 부부의 연을 맺었던 여인의 마지막 소원을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세자를 희빈 장씨에게 데려다 주었는데 이때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독기 서린 눈빛으로 변한 희빈 장씨가 세자에게 달려들어 그의 고환을 잡아당겨 남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장희빈의 간악함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로 인식하지만 여하튼 경종에게 있어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경종은 평생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병환에 시달렸고 자식도 남기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또 한 가지의 전설은 경종의 독살설이다. 경종은 장이 안 좋으면서 게장을 아주 좋아했다고 하며 그런 왕에게 음식상극인 게장과 곶감을 올렸고 결국 탈이 났다. 이때 연잉군이 직접 인삼차를 달여서 올렸는데 그날에 경종이 죽게 되어 이후 영조가 경종을 죽였다는 소문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참고적으로 식중독에는 인삼차가 상극이라고 한다.
의릉은 쌍릉이지만 다른 왕릉과 약간 다른 점이 보인다. 왕릉과 왕비릉이 각각 단릉의 상설을 모두 갖추었지만 뒤에 있는 왕릉에만 곡장을 둘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나 이 능은 앞뒤로 약간 축을 비껴 능역을 조성하였다. 전후능설제도(前後陵設制度)는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가 묻힌 여주의 영릉(寧陵)에서 처음 나타난 형식이다. 이러한 배치는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 이유이기는 하지만 능역이라는 거국적인 행사임에도 자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능원을 조성하려는 우리 민족 고유의 자연관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영릉과 다른 점은 영릉은 왕과 왕비의 두 봉분이 약간 엇비슷하게 배치한 반면 의릉은 두 봉분이 앞뒤로 벗어나지 않도록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홍살문 앞에 명당수가 흐르는 금천이 있으며 그 위에 금천교가 있다. 정자각은 정청이 앞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에 양쪽에 1칸씩 익랑을 덧붙인 것이 특이하다. 이와 같은 정청 설계는 비슷한 시기에 조영한 휘릉, 숭릉, 익릉, 의릉에서 볼 수 있다. 배위청은 옆면 1칸 앞면 2칸의 건물로 일반적이다. 참도는 박석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대소형의 사각형 돌로 정돈되어 있는데 근래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문화재청 의릉관리소 조한금 선생은 설명한다.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을 세우지 아니하고 능침 주위로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난간 석주에 방위를 나타내는 12지를 문자로 간략히 새겨 넣었다. 석양, 석호 각 2쌍, 석상 1좌, 망주석 1쌍, 3면의 곡장으로서 위 층계를 이루었다. 석호의 꼬리가 몸통을 지나 목 뒤까지 이어지도록 묘사한 것은 다른 능의 석호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한 단 아래에는 문인석과 석마 각 1쌍, 사각형 장등석 1좌가 있고, 그 아래 층계에는 무인석·석마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문⋅무인석은 4등신의 땅딸막한 비례에 움츠러든 어깨로 다소 경직스럽게 보인다. 갑주를 걸치고 장검을 두 손으로 힘차게 짚고 있는 무인석의 뒷면에는 짐승 가죽을 나타내기 위해 꼬리가 말려 있어 석공의 재주를 가늠케 한다.
망주석 세호는 모두 위를 향해 기어오르게 조각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에서 부친 숙종 명릉(明陵)의 망주석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다. 장명등은 지붕이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숙종 때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형식으로 건원릉부터 나타난 8각등에 비해 한결 간략하면서도 소박한 인상을 준다.
왕후릉은 왕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봉분을 호위하고 있으며 곡장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석물은 왕릉과 같다. 석물의 배치와 양식은 명릉(明陵)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厚陵制度)를 택하였는데 이는『속오례의』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의릉의 능역은 11만 4,658평이다. 능표에는 ‘조선국 경종대왕의릉선의왕후부’라고 음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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